[미디어전남] 논설위원 고운석 = 죽었다고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은 다만 앞길을 서둘러 갔을 뿐이라고 세네카는 말 하고 있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충신열사 등을 기리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구한말 매천야록(梅泉野錄)이라는 역사서를 쓴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은 전남 구례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살았다. 그는 성리학과 양명학을 공부했으며 이용후생을 강조한 깨어 있는 학자였다.
젊은 날 한양에 올라가 이건창, 김택영, 강위, 신기선 등 당대 내로라하는 문사(文士)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개혁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사회는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그는 눈에 비친 조선은 ‘귀신의 나라’였고 ‘미친놈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조정 지배층을’ 귀국광인(貴國狂人)’이라고 비판하며 미련 없이 낙향했다.
이후 매천은 1910년 8월 3일 순종이 나라를 일본에 넘긴 사실을 전해 듣고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8월 6일 절명시(絶命詩)와 자손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뒤 아편을 다량으로 복용한다. 다음날 아침 동생 황완이 쓰러져 있는 매천을 발견하고 해독제를 먹이려 하니 매천은 이를 거부하며 “세상 일이 이모양이니 선비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뒤 7일 새벽에 숨졌다.
매천은 절명시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썼다. ‘내 일직이 나라를 지탱하는 작은 공도 없었으나 오직 살신하며 인(仁)을 이룸이요, 충(忠)은 아니로세. ‘여기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초야에 묻힌 선비로서 의병 항쟁을 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잘 드러나 있다. 결국 그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자결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월호 사태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데 이어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단원고 교감이 목숨을 끊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 관계자는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 는 무잭임한 발언을 서슴치 않고, 국무총리 사의 표명은 오히려 책임 회피라는 비난을 받았다. 선대 국왕들은 천재지변이나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면 모두 자신들 책임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잘못한 사람을 찾아 끝까지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발표만 하고, 누구하나 자기 책임이라고 소신있게 나서는 사람이 없다. 알려진봐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 참사에는 온갖 불법행위들이 뒤엉켜 있다. 선장과 승무원은 승객을 남겨둔 채 자기들 먼저 도망쳤고 청해진해운은 더 많은 화물을 실으려고 안정 규정을 무시했다. 청해진해운 소유주는 회사 자금 빼먹기에 여념이 없었고 선박 안전검사는 엉터리였다. 법치국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대형 참사가 터질 때 마다 국민은 분노했고 정부는 일벌백계를 다짐했다.
결과는 어떤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502명이 사망했지만 책임자인 이준 삼풍그룹 회장에게 내려진 형량은 한명을 살인한 사건보다 낮은 7년6개월이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서도 32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현장관리소장만 금고 2년형을 받았을 뿐이다. 이탈리아 여객선 콩코르디아호가 2012년 침몰해 32명이 사망했을 때 배에서 먼저 탈출한 선장에게 2697년형이 구형된 것과 대조된다.
과거 대형 참사 때 일벌백계하는 선례를 남겼다면 이번 세월호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우리 형법 체계다. 미국 이탈리아 등은 살인죄 상해죄등 여러 범죄를 저지르면 각 범죄 형량을 합산해 처벌한다. 징역 2697년이 가능한 까닭이다. 이에 비해 우리 형법은 가장 형량이 큰 살인죄를 적용하고 나머지 범죄는 형량을 50%한도에서 가중할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유기징역 한도는 30년 이어서 최악의 가중 처벌을 받아도 징역형은 45년까지다. 사망자가 많을 때 처벌을 가중하는 조항도 없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에게 검찰은 무기징역까지 처할 수 있는 죄목을 적용했다지만 법리 해석에 범조계 의견이 엇갈리는 만큼 또 솜방망이 처벌이 될까 염려된다. 답답한 것은 “우린 법대로 할 뿐” 이라고 판사들과 나몰라라 하는 국회가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매천이 요즘 시대에 살았다면 또다시 ‘귀국광인’들이 설치는 세상이라고 말 할 것이 뻔하다.
